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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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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푸아티에 전투는 1356년 백년 전쟁 중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이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포로로 잡는 등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사용했던 전술을 활용하여 수적으로 열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브레티니 조약을 통해 영토를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푸아티에 전투는 중세 전투의 전술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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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 전투
위치 정보
전투 정보
전투 명칭푸아티에 전투
일부백년 전쟁
날짜1356년 9월 19일
장소프랑스, 푸아티에 인근
좌표46.54, 0.39
결과잉글랜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잉글랜드
교전국 2프랑스
지휘관
지휘관 1에드워드 흑태자
지휘관 2장 2세
기타 지휘관필리프 2세
도팽 샤를
피에르 1세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
병력
병력 16,000명
병력 214,000–16,000명
사상자
사상자 1~40명의 무장병 사망
다수의 일반 보병 사망
사상자 24,500명 이상의 무장병 사망 또는 포로
1,500명 또는 3,800명의 일반 보병 사망 또는 포로
기타 정보
1356년 푸아티에 전투의 모습
푸아티에 전투,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 작품
관련 전쟁에드워드 전쟁
백년 전쟁

2. 배경

1066년 노르망디 공국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 내에서 작위와 영지를 소유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 14세기 초까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서 소유한 유의미한 영토는 남서부의 가스코뉴뿐이었다. 하지만 가스코뉴는 매우 중요했다. 잉글랜드 왕관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서 거두는 포도주 세금은 다른 모든 잉글랜드 관세 수입을 합친 것보다 많았고, 국가 수입의 가장 큰 원천이었다. 보르도의 인구는 5만 명이 넘어 런던보다 많았고, 아마도 런던보다 부유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사이의 일련의 불화 끝에, 1337년 5월 24일 필리프의 대평의회는 에드워드 3세가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가 프랑스에서 소유한 영토를 필리프에게 몰수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116년간 지속될 백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a map of France showing only a small part of the south-west under English control
1330년 프랑스: 가스코뉴만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가스코뉴가 전쟁의 원인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는 방어를 위해 소수의 병력만을 할당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 시즌 동안 가스콘인들은 자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고 프랑스군에 압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가스콘인들은 3,000~6,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병이었지만, 그중 3분의 2까지는 요새 방어에 배치되었다. 1345년과 1346년 헨리 랭커스터 백작은 아키텐에서 일련의 성공적인 잉글랜드-가스코뉴 원정을 이끌었고, 전투의 초점을 가스코뉴 중심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1347년 8월,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가 잉글랜드에 함락되었다. 이후 곧 칼레 휴전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양국 모두 재정적으로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에 흑사병이 북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흑사병 지역에 도달했고, 서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인 것으로 추산된다. 남부 잉글랜드의 사망률은 40%가 넘었다. 1350년까지 지속된 이 재앙은 전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이 조약은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연장되었지만, 지속적인 해상 충돌이나 소규모 전투, 특히 남서부 프랑스에서 격렬했던 전투, 혹은 때때로 대규모 전투를 막지는 못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약이 기네스에서 협상되어 1354년 4월 6일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프랑스의 잔(장 2세)의 측근들의 구성이 바뀌면서 여론이 조약의 조항에 반대하게 되었다. 장 2세는 조약을 비준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1355년 여름부터 양측 모두 대규모 전쟁에 돌입할 것이 명확해졌다. 1355년 4월, 에드워드 3세와 그의 평의회는 국고가 이례적으로 풍족한 상황에서 그 해에 북부 프랑스와 가스코뉴 양쪽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여 북부 도시와 요새를 강력하게 방어하는 동시에 야전군을 집결하려고 했지만, 주로 자금 부족으로 그럴 수 없었다.

2. 1. 1356년 흑태자의 원정

1356년 8월 8일, 흑태자 에드워드는 아키텐에서 북쪽으로 대규모 기병 약탈 작전(chevauchée프랑스어[2])을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 중부 지역을 약탈하고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잉글랜드군과 가스코뉴 병사들은 루아르강 근처 투르까지 진격하며 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했다.[3] 그러나 폭우로 인해 투르의 도시와 성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지연은 프랑스 왕 장 2세가 흑태자의 군대를 추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르망디에서 그로몽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대치 중이던 장 2세는 샤르트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보병 대부분을 해산했다.

프랑스군의 이동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장 2세는 흑태자를 맹렬히 추격했고, 프랑스군은 푸아티에 남서쪽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에서 사용했던 전술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수비에 유리한 평원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는 보르도로 가는 로마 도로에 약탈품을 실은 짐수레를 배치하여 오른쪽 측면을 방어했다. 흑태자는 하마한 기사와 병사들을 배치하고, 장궁 궁수들을 V자 형태로 배치했다.[4] 또한, 장 드 그레이 3세가 지휘하는 소규모 기병 부대를 숲 속에 매복시켰다.

공격하는 프랑스군은 4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최전방에는 클레르몽 장군이 지휘하는 300명의 정예 기사와 독일인 용병 파이크맨 혼성 부대가 배치되어 잉글랜드 궁수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에는 하마한 기사로 구성된 세 개의 보병 부대가 따랐으며, 각각 샤를 5세,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가 지휘했다.

3. 전투의 전개

푸아티에 전투.


잉글랜드군 좌익의 위장 퇴각은 전투 개시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프랑스 기사들이 궁수들을 향해 성급하게 돌격하게 만들었지만, 잉글랜드군은 이를 예상하고 재빨리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공격했다. 특히 기사가 탄 말이 주요 목표물이었다. 장 프루아사르는 프랑스 기사의 갑옷이 영국군의 화살을 막아내고 갑옷 표면에서 미끄러지거나 화살촉(Bodkin point)이 깨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영국 측 기록에서는 뾰족한 송곳 같은 촉을 가진 화살이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하는 성능을 가졌다고 반박한다.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옳다고 보이는 이유는, 마갑이 측면과 후면 공격에 취약하여 영국 궁수들이 기사들의 측면으로 이동해 말을 쏘았기 때문이다. 이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저지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이어진 도팽(왕세자)이 이끄는 보병 부대의 공격은 갑옷의 무게로 1km 이상 떨어진 적군 진영까지 행군하느라 지친 상태에서 쏟아지는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그 다음 전열인 오를레앙 공작의 보병들은 왕세자 부대가 공격도 시도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 공황 상태에 빠져 퇴각했다.

달아나는 프랑스군은 장 2세가 이끄는 마지막 전열의 움직임도 묶어 버렸다. 영국 궁수들은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지만, 장 2세의 제4 전대가 패주하는 부대에 발이 묶인 사이 보병 대오에 합류했고, 일부는 말에 올라타 즉흥적인 기병대를 형성하려 했다.[5] 장 2세의 네 번째 부대가 전선에 이르러 격전이 벌어졌지만, 흑태자는 후방 숲 속에 잠복시켰던 기병대를 출격시켜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했다. 프랑스군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도주했고, 장 2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6]

전투 전 움직임.
전투 지도.


3. 1. 양측 군대의 배치



잉글랜드에드워드 흑태자크레시 전투에서 사용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자연적인 장애물로 둘러싸인 평야에 진을 쳤다. 잉글랜드 군은 푸아티에 남쪽 누아예 숲 근처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다. 진영의 좌측면은 작은 개울에, 후방은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유일하게 약한 우측면에는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로마 시대부터 있던 고대 도로가 있었는데, 약탈품을 실은 수레를 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흑태자는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장궁을 든 장궁병을 양 측면에 V자 형태로 배치했다.[5] 그리고 장 3세 드 그라이이가 이끄는 200기 정도의 기병 부대를 후방 숲에 매복시켰다.[6]

프랑스장 2세는 부대를 네 개로 나누어 배치했다.

  • 제1진은 장 드 클레르몽(Jean de Clermont) 원수가 이끄는 정예 기사 300명과 창을 든 독일 용병 부대, 석궁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적의 장궁 부대에 대항하는 역할을 맡았다.
  • 제2진은 프랑스 왕세자이자 후일 샤를 5세가 이끄는 약 4,000명의 부대였다.
  • 제3진은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이끄는 약 3,000명의 부대였다.
  • 제4진은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약 6,000명의 부대였다.


이때, 300명을 제외한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서 전투에 참가했다.

3. 2. 전투의 경과



잉글랜드군 좌익의 위장 퇴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는 프랑스 기사들이 궁수들을 향해 성급하게 돌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이를 예상하고, 빠르게 적에게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공격했다. 특히 기사가 탄 말이 주요 목표물이었다. 장 프루아사르는 그의 저서 『연대기』에서 잉글랜드 병사들이 쏜 화살은 프랑스 기사들의 갑옷 위를 미끄러져 충격이 완화되어 프랑스 기사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어쨌든 기병의 갑옷을 관통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의 갑옷은 측면이나 후방의 공격에는 약했기 때문에, 장궁 부대는 프랑스군의 측면으로 우회하여 말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제1진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궤멸되었다.[5]

이어서 도팽(왕세자)이 이끄는 보병 부대가 공격했지만, 잉글랜드군 전열에 이르지도 못한 채 쏟아지는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 재편성을 위해 후퇴했다. 이를 본 오를레앙 공작 휘하의 보병 부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패주했고, 장 2세가 이끄는 마지막 전열은 진군하지 못하고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잉글랜드군은 화살이 부족해지자 궁병들도 검을 뽑아 백병전에 대비했고, 보병 일부는 기승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흑태자는 후방 숲 속에 기병대를 매복시켜 두었고, 이들은 숲에서 빠져나와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했다. 프랑스군은 포위당한다는 두려움에 도주를 시작했고, 프랑스 왕 장 2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6]

전투를 묘사한 현대적인 그림


장 2세의 포획을 보여주는 삽화 부분

3. 2. 1. 잉글랜드군의 전술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의 원거리 공격 능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장궁은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석궁보다 사거리와 연사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5] 잉글랜드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흑태자는 예비대를 적절히 운용하고, 기병 부대를 매복시켜 프랑스군의 측후방을 기습하는 등 유연한 전술을 구사했다.[6]

장 프루아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기사의 갑옷은 잉글랜드군의 화살을 막아내지 못하고, 화살촉이 깨지거나 갑옷 표면에 미끄러졌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 기록에는 뾰족한 송곳 같은 촉을 가진 화살이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하는 성능을 가졌다고 반박한다.[5]

프랑스 기병의 마갑은 측면과 후면 공격에 취약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기사들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말을 쏘아 쓰러뜨렸다. 쓰러지는 말들은 프랑스군 전열을 붕괴시키고 기사 집단의 위협을 제거했다.[5]

프랑스 왕 장 2세의 부대가 전선에 이르렀을 때, 흑태자는 숲 속에 매복시킨 기병대를 출격시켜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했다. 프랑스군은 포위당할 것을 우려하여 도주했고, 장 2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6]

3. 2. 2. 프랑스군의 패인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위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기병 돌격은 장궁병의 집중 사격에 번번이 좌절되었고, 보병 역시 장궁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5] 장 프루아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기사의 갑옷은 잉글랜드 화살에 관통되지 않았지만, 마갑은 측면과 후면 공격에 취약했다. 잉글랜드 궁수대는 기사들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말을 쏘아 쓰러뜨림으로써 프랑스 기사들의 전열을 붕괴시켰다.

도팽(왕세자)이 이끄는 보병 부대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1km 이상 떨어진 잉글랜드군 진영까지 행군하느라 지쳐 있었고, 쏟아지는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보병 부대는 왕세자 부대의 퇴각을 보고 공황 상태에 빠져 달아났다.[5]

프랑스군은 지휘 체계가 혼란스러웠고, 부대 간의 협력이 부족했다. 각 부대는 개별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다가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각개격파 당했다. 장 2세는 전투 경험이 부족한 아들 샤를 왕세자와 동생 오를레앙 공작에게 중요한 지휘를 맡겼는데, 이들은 전투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6]

4. 전투의 영향

푸아티에 전투는 프랑스에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7] 프랑스는 장 2세의 몸값으로 국가 1년 수입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장 2세는 포로 생활 중에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몸값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1364년 영국에서 사망했다.

이 전투는 크레시 전투처럼 전술과 전략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흑태자는 전투 직후 런던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언급했다.

브레티니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는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할양받고, 장 2세의 막대한 몸값을 얻는 등 큰 이익을 보았다.

4. 1. 프랑스의 피해



푸아티에 전투의 결과는 프랑스에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참패였다.[7] 프랑스는 왕의 귀환을 위해 몸값으로 나라 전체 1년치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다.

여러 현대 자료에 따르면,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 2,000~3,000명과 보병 500~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여기에는 프랑스 국왕과 그의 막내 아들 외에도 생스 대주교, 프랑스 원수 두 명 중 한 명, 생통주, 투르, 푸아투의 센에샬(seneschal) 등이 포함되었다. 프랑스 기사 약 2,500명이 전사했고, 영국측 기록에 따르면 보병 3,300명, 프랑스측 기록에 따르면 700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중에는 프랑스 국왕의 삼촌, 프랑스 대 원수, 다른 한 명의 원수, 샬롱 주교, 흑태자 에드워드의 깃발수였던 제프루아 드 샤르니가 포함되었다. 당시 한 사람은 프랑스가 "막대한 피해, 엄청난 슬픔,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는 처음에는 50만 파운드(1파운드=1투르貨 리브르)라는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지만,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에퀴 금화 400만 매가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브레티니 조약에서 합의된 몸값은 에퀴 금화 300만 매였다. 이 금액은 결국 전액 지불되지 않았고, 인질 중 한 명이었던 루이 1세 드 앙주(샤를 5세의 동생)의 탈출과 지불 지연으로 인해 장 2세는 일단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런던으로 다시 가서 포로 상태로 사망하게 되었다.

4. 2. 잉글랜드의 이점

크레시 전투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전술과 전략을 통해 수적인 열세를 극복했다. 에드워드 흑태자가 런던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앵글로-가스콘 군대는 6,000명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기병: 3,000명
  • 영국과 웨일스의 궁수: 2,000명
  • 가스콘 보병: 1,000명 (\석궁이나 으로 무장한 경보병)


모든 병사들은 말을 타고 이동했지만, 전투 시에는 말에서 내려 싸웠다.

기병들은 대부분 기사 또는 기사 훈련생으로, 지주 계급 출신이었다. 이들은 완전한 갑옷과 군마를 스스로 장비했으며, 사슬 갑옷 위에 누빈 감베손을 착용하고, 판금 갑옷으로 보강했다. 머리는 바시넷으로 보호하고, 움직이는 면갑(얼굴 가리개)과 히터 방패를 휴대했다. 잉글랜드 기병들은 을 곤봉처럼 사용하거나, 짧은 , 검, 전투 도끼로 싸웠다.

철촉의 사진
보드킨 포인트 촉을 사용하여 갑옷을 관통하는 영국 장궁의 현대 복제품


영국과 웨일스 궁수들이 사용한 장궁은 숙련된 궁수가 분당 최대 10개의 화살을 약 301.75m 이상 발사할 수 있는 독특한 무기였다. 무거운 보드킨 포인트 화살은 약 228.60m에서 판금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으며, 근거리에서는 어떤 두께의 판금 갑옷도 관통 가능했다. 궁수들은 24개의 화살이 든 화살통을 휴대했고, 전투 중 탄약 재보급을 받거나 화살을 회수하기도 했다.

앵글로-가스콘 군대는 세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

부대지휘관구성비고
왼쪽 부대토마스, 워릭 백작기병 1,000명, 궁수 1,000명궁수는 기병 왼쪽에 배치
우익 부대윌리엄, 솔즈베리 백작기병 1,000명, 장궁병 1,000명궁수는 기병 우익에 배치
중앙 부대흑태자기병 1,000명, 가스콘 보병 1,000명처음에 예비대로 배치



각 부대는 4~5명 깊이로 배치되었으며, 왕자 부대 뒤에 소규모 예비대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 3. 브레티니 조약

브르티니 조약 당시 프랑스 지도; 영국에 할양된 영토 표시
1360년 브르티니 조약 이후 프랑스; 프랑스 영토는 녹색, 영국 영토는 분홍색


1360년 4월 13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과 격렬한 우박 폭풍으로 많은 영국 군수품 운반 말과 일부 병사들이 사망했다. 이를 하느님의 계시로 여긴 에드워드 3세는 도팽과 직접 협상을 재개했다. 5월 8일, 브르티니 조약이 합의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제1차 런던 조약 또는 귄 조약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광대한 지역이 영국에 할양되어 흑태자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고, 장 2세는 300만 에퀴 금화에 몸값을 치르게 되었다. 로저스는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를 완전한 주권으로 얻었고, 포로로 잡힌 장 왕의 거액의 몸값은 그의 원래 전쟁 목표 이상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조약 체결로 장 2세뿐만 아니라 푸아티에에서 포로로 잡힌 고위 귀족 16명도 마침내 석방되었다.

잉글랜드는 처음에는 50만 파운드(1파운드는 1투르 리브르)라는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지만,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400만 에퀴 금화로 늘어났고, 최종적으로 브르티니 조약에서는 300만 에퀴 금화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결국 전액 지불되지 않았다. 인질 중 한 명이었던 앙주 공 루이(샤를 5세의 동생)가 탈출하고 몸값 지불이 지연되자, 장 2세는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런던으로 돌아가 포로 상태로 사망했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몇 년 전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를 포로로 잡았을 때의 몸값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생각과, 왕으로서의 지위로 몸값을 요구하면 장 2세의 프랑스 왕위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에드워드 3세의 입장에서는 "발루아 백작"을 잡은 것으로 몸값을 설정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섹션 제목, 요약 등을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참조

[1] 서적 The Battle Book Arms and Armour Press
[2] 문서 단어 자체가 이 의미이다. 백년 전쟁 기 영국군의 이 노략질은 영국이 자랑하는 전술로 이를 통해 많은 영국인들이 부를 축적하였고, 백성들이 국왕 전하를 위해 열성적으로 참전하는 주된 동기가 되었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 영국군은 보병과 궁수들도 모두 말이나 나귀를 타고 이동하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3] 문서 영국인의 약탈이 있기 전과 있은 후에 남프랑스를 방문한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트카는 그 풍요로운 지방이 완전 황폐화되었다고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Crécy http://www.myarmoury[...]
[5] 문서 영국군은 기동성을 잃지 않고 chevauchée (raid)-기마 노략질-을 수행하기 위해 궁수들도 말에 태우고 이동하였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6]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7] 서적 Medieval England 1000–1500: A Reader Broadview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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